아주 오래전...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저를 사랑해주었지요.
처음엔 그냥 친절하게 대해줬을 뿐이었습니다.
이상하죠,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나도 점차 소녀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그 소녀를 만나게 되었고,
소녀는 나에게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우습게도 나는 다른 곳에서 받았던 상처라는 핑계로,
소녀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조건을 내밀었고,
소녀는 그렇게 울면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시간이 더더욱 흐르고, 흘러...
잊은 줄 알았던 소녀가 자꾸만 눈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한 번씩 소녀와 닮은 사람을 마주치게 되더니,
닮은 사람이 많아지고, 더 늘어나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서 소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심지어 꿈에서도.


또다시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소녀와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소녀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을 했었고,
그 사랑과 인연이 아니었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녀 곁을 맴돌고, 소녀는 나를 향해 웃어주네요.
하지만 그 소녀의 그 웃음은...
예전의 그 웃음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소녀의 마음은 닫혀 있네요.
적어도, 나를 향한 마음은 닫혀 있었죠.


네, 내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소녀는 무심하게 말합니다.
우린 그때 끝났노라고, 아니 시작도 안 했었다고.


난 소녀의 곁을 지키고 싶어요.
아주 오래도록, 정말 오랜 시간을...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걸 원망도 해봤지만,
어쩌겠습니까?
내가 만들어둔, 내가 남겨둔 상처인 걸.


또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친구에 한없이 가깝고, 연인에서는 한없이 먼...
그런 사이로 만남을 유지하다가 이번엔 내가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네, 거절당했죠.
그 소녀, 아니 아니...
이제는 그 여인은 저에게 말합니다.
더 이상 너의 자리는 없다고...
사랑을 말하면 더 이상의 만남도 부담스럽다고...


사랑...으로 그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슬프네요.
그렇다고 거짓으로 만날 수도 없어요.
그것은 감추고 싶다고 감출 수 없으니까요.


그 소녀에게 주었던 상처를,
이젠 그 여인에게 갚아주어야 하는데...
소녀의 마음은 닫혀 있어요.

 


후회합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늘 그렇듯이 후회하고 있어요.
지난 시간, 왜 그 소녀를 혼자 뒀는지...
왜 그 소녀를 울렸는지...


그 여인에게 받는 상처는 견딜 수 있습니다.
그 소녀의 여린 마음이 새겨진 상처는 더 깊었을 테니까요.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그 여인에게 얼마나 더 상처를 받아야,
그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요?


이 순간 흐르는, 이 값싼 눈물로 그 후회를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간을 돌리지 못하더라도, 그 소녀에게 줬던 그 상처라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니, 다시 한번만 그 소녀가 마음을 열어준다면, 자그마한 틈이라도 보여준다면 좋겠어요.
다시 그 여인과, 그 소녀의 시간을 나눌 수만 있다면,
지난 시간, 그 오랜 시간의 보상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상하게 그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요.
그 여인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네요.
늘 그 소녀, 그 여인만 생각했노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그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요.


무심한 그 여인의 목소리 때문일까요?
그 여인도, 나에게 받은 상처로...
이렇게 날 지워갔겠죠.
깊게 새겨진, 슬픈 상처를 이렇게 눈물로 지워갔겠죠.
상처에 맺힌 눈물이 지금의 그 여인을 만든 거겠죠.


결국, 나 때문에.
그러니, 나 역시 그 여인에게 상처 받았다 생각해선 안 되겠죠.
더 상처 받고, 더 슬퍼해야겠죠.
내가 준 길고 긴 시간의 보상을 그렇게라도 해야겠죠.


이 순간, 그 여인이 날 돌아봐 주는 것.
그 여인의 마음에 틈이 생기길 바라는 것.
그 여인의 상처가 완전히 지워지는 것.

어떤 이유에서라도 그 여인이 나를 한 번 떠올려주는 것.
그런 것보다는 그 여인에게 계속 상처 받을 기회라도 유지되길 기원해야겠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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