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에, 우리가 늙고 병들어 이 세상에서 사라질 그런 훗날에
난 그대와 어떤 시간을 맞을까?

 

그대 곁에 내가 서 있을까?
아니면 지금처럼 멀리서 겉돌기만 할까?
아예 그대를 바라볼 수도 없는 곳에서 그대를 그리워할까?
심지어 그대를 잊고 살아갈까?

 

또한 그대는 어떤가?


나와 나란히 서 있을까?
아니면 나와 나란히 서지 못해 아쉬워할까?
아예 나의 기억은 그냥 먼 옛날의 과거의 일일까?
어쩌면 나란 존재 자체를 잊고 있진 않을까?


하루하루 망상에 망상, 그리고 또 망상만 덧칠하고 있을 뿐이네.

잊어주자.

마음먹어도, 과연 잊을 수 있을까?

 

시간의 흐름에 닳고 닳다 보면 잊을 수 있으려나.

그렇다면 그 시간은 언제나 오려나.

어느 정도를 기다리면 닳고 있다는 느낌이라도 올까?

 

아니다.

라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혹은 듣지 않았으니 모든 상황이 아니라고 흘러가도,

부질없는 미련만 끝내 부여잡는 지금 꼴을 보니 참으로 어렵겠구나.

 

반가운 전화를 몇 시간쯤 하고 나니 기대감이 차올라 홀로 망상에 빠져보고,

또 돌아온 현실에 가슴은 베이고...

차라리 연락조차 하지 말라는 말이라도 들으면 시원하련만.

 

잊어야 하는 걸까?

오히려 잊지 않으려 노력해야 할까?

 

먼 훗날.

어쩌면 멀지 않은 그 시간이 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 앞에 나타나야 할까?

혹은,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까?

 

훗날 내 옆에 있는 사람의 흐릿한 그림자라도 볼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아니 내 옆에 있을 사람이 있는지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네.

그렇다면 적어도 그 그림자를 내가 믿는 그 사람이라 믿으며 살아가겠지.

그것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말이지.

"음..."
여자는 무언가 거북하고, 무거운 신음을 내며 눈을 뜬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불을 켠다.
무엇이었을까? 무엇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너무 무서운 꿈이었던 것 같다.


여자는 잠시 무슨 꿈이었는지 생각하다, 문득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본다.
자신이 일어난 옆자리에서 생각 없이 자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여자는 그 남자가 얄미워졌다.
별 다른 이유 없이, 잘 자고 있는 그 남자.


문득 여자는 가늘게 미소를 짓는다.
무서웠던 기억이 잠자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그저 얄미운 감정에 사라진 걸 깨달았기에.
여자는 다시 불을 끄고는 그 남자의 옆자리에 눕는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았고, 남자는 여자 쪽으로 잠결에 몸을 돌린다.
남자의 팔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려왔고, 여자는 살짝 고개를 들어준다.
그렇게 팔베개를 해준 남자는 다른 팔로 여자를 가볍게 안는다.
그리고는 천천히 여자의 등을 두드려 준다.


'무서워하지 말고 자, 옆에 내가 있잖아'
남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여자에겐 그 속삭임이 들려온다.
자신을 감싸는 남자의 억센 팔이 유달리 부드럽게 느껴지고,
여자는 응석부리듯 남자의 가슴에 살며시 기댄다.


남자의 평온한 심장 소리가 느껴진다.
여자는 따스한 그 심장을 느끼며, 그 소리를 헤아린다.
그렇게, 그렇게... 남자의 평온함에 취해 여자도 잠이 든다.

아주 오래전...
한 소녀를 만났습니다.


소녀는 저를 사랑해주었지요.
처음엔 그냥 친절하게 대해줬을 뿐이었습니다.
이상하죠,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나도 점차 소녀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그 소녀를 만나게 되었고,
소녀는 나에게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우습게도 나는 다른 곳에서 받았던 상처라는 핑계로,
소녀에게 납득하기 어려운 조건을 내밀었고,
소녀는 그렇게 울면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시간이 더더욱 흐르고, 흘러...
잊은 줄 알았던 소녀가 자꾸만 눈 앞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한 번씩 소녀와 닮은 사람을 마주치게 되더니,
닮은 사람이 많아지고, 더 늘어나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서 소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심지어 꿈에서도.


또다시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소녀와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소녀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을 했었고,
그 사랑과 인연이 아니었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녀 곁을 맴돌고, 소녀는 나를 향해 웃어주네요.
하지만 그 소녀의 그 웃음은...
예전의 그 웃음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소녀의 마음은 닫혀 있네요.
적어도, 나를 향한 마음은 닫혀 있었죠.


네, 내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소녀는 무심하게 말합니다.
우린 그때 끝났노라고, 아니 시작도 안 했었다고.


난 소녀의 곁을 지키고 싶어요.
아주 오래도록, 정말 오랜 시간을...
나의 마음을 몰라주는 걸 원망도 해봤지만,
어쩌겠습니까?
내가 만들어둔, 내가 남겨둔 상처인 걸.


또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친구에 한없이 가깝고, 연인에서는 한없이 먼...
그런 사이로 만남을 유지하다가 이번엔 내가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네, 거절당했죠.
그 소녀, 아니 아니...
이제는 그 여인은 저에게 말합니다.
더 이상 너의 자리는 없다고...
사랑을 말하면 더 이상의 만남도 부담스럽다고...


사랑...으로 그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슬프네요.
그렇다고 거짓으로 만날 수도 없어요.
그것은 감추고 싶다고 감출 수 없으니까요.


그 소녀에게 주었던 상처를,
이젠 그 여인에게 갚아주어야 하는데...
소녀의 마음은 닫혀 있어요.

 


후회합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늘 그렇듯이 후회하고 있어요.
지난 시간, 왜 그 소녀를 혼자 뒀는지...
왜 그 소녀를 울렸는지...


그 여인에게 받는 상처는 견딜 수 있습니다.
그 소녀의 여린 마음이 새겨진 상처는 더 깊었을 테니까요.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그 여인에게 얼마나 더 상처를 받아야,
그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요?


이 순간 흐르는, 이 값싼 눈물로 그 후회를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간을 돌리지 못하더라도, 그 소녀에게 줬던 그 상처라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니, 다시 한번만 그 소녀가 마음을 열어준다면, 자그마한 틈이라도 보여준다면 좋겠어요.
다시 그 여인과, 그 소녀의 시간을 나눌 수만 있다면,
지난 시간, 그 오랜 시간의 보상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상하게 그 소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요.
그 여인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네요.
늘 그 소녀, 그 여인만 생각했노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데,
그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요.


무심한 그 여인의 목소리 때문일까요?
그 여인도, 나에게 받은 상처로...
이렇게 날 지워갔겠죠.
깊게 새겨진, 슬픈 상처를 이렇게 눈물로 지워갔겠죠.
상처에 맺힌 눈물이 지금의 그 여인을 만든 거겠죠.


결국, 나 때문에.
그러니, 나 역시 그 여인에게 상처 받았다 생각해선 안 되겠죠.
더 상처 받고, 더 슬퍼해야겠죠.
내가 준 길고 긴 시간의 보상을 그렇게라도 해야겠죠.


이 순간, 그 여인이 날 돌아봐 주는 것.
그 여인의 마음에 틈이 생기길 바라는 것.
그 여인의 상처가 완전히 지워지는 것.

어떤 이유에서라도 그 여인이 나를 한 번 떠올려주는 것.
그런 것보다는 그 여인에게 계속 상처 받을 기회라도 유지되길 기원해야겠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니.

당신 어디에 있나요, 저 우주 어딘가에 당신이 있겠죠.
이곳엔 파랗디 파란 바다와 내가 있어요.
조각구름이 한가로이 떠도는 푸르른 하늘,
그리고 눈부신 햇살 아래에, 거기에 내가 있어요.

 

하늘에서 한 조각 빛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어요.
파란 바다에 떨어진 그 빛, 왠지 당신이었으면 해요.
당신 그 빛을 타고, 또는 그 빛 자체가 당신이었으면 해요.
나에게 은은하게 다가올 그 빛이길 바라요.

 

바다를 나온 그 빛은 점점 옅어지네요.
마침내 뭍으로 올라왔을 때, 그 빛은 슬며시 사라졌지만,
그래도 난 그 빛을 볼 수 있죠, 그 빛이 당신이기에.
역시나 그 빛은 당신이었어요.

 


당신 왜 오지 않나요, 오늘은 당신이 오리라 믿었어요.
이 별에서 당신을 반겨줄 사람, 그 사람은 오직 나예요.
당신도 알고 있겠죠? 그 사람이 나라는 것을.
당신의 지친 여행을 지켜봐 줄 사람, 그 사람이 나란 것을.

 

당신은 어쩌면 우연이라 생각할지 몰라요.
이별에서 당신과 내가 만나는 일을.
그렇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오기를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이제 말할 게요, 당신. 나의 당신에게.
당신의 영혼을 부른 건 나였어요.
나의 그림자로 당신의 외로움을 채워주려 당신을 불렀어요.
그렇게 말할 거예요.

 


당신 언제쯤 오나요, 나 지금 졸음이 몰려오는데,
창문을 조금 열어둘 테니 언제든 나에게 오세요.
내가 잠든 후에라도, 혹은 잠시 자리를 비웠더라도,
당신은 나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당신을 만나려 그 오랜 시간 나 이 별에서 묵묵히 기다렸어요.
당신의 지친 영혼을 내 그림자로 감싸주려 기다렸어요.
우주에서 당신이 마침내 쉬어갈 곳이 이 별이기에,
당신을 부르며 이 자리를 지켰어요.

 

말해줘요, 그대. 이제 내 그림자에 머물겠노라고.
내가 있는 이 별에서 영혼의 여행을 끝내겠다고.
내 그림자에 당신의 영혼을 영원히 기댈 수 있어 기쁘다고.
오랜 시간 홀로 이 별에서 당신을 기다린 나와 서로 기대어 쉬겠다고.

 


마침내 당신이 이 별에, 그리고 내 곁에 왔어요.
이 별엔 온통 내 그림자만 보인다는 그대의 말이 나를 취하게 해요.
이 별은 오직 내 그림자뿐이라는 그대의 말이 어쩐지 부끄럽게 해요.
다른 곳에 눈길을 주지 않으며, 나만 보인다는 그대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려요.

 

당신이 살며시 내 손을 잡아주네요.
두근거리는 내 심장의 울림을 그 손에서 알게 될까 부끄러워요.
내 심장의 울림을 알게 되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당신은 내 심장을 느끼며, 잡은 손 다정히 감싸주네요.

 

나의 눈에는 온 세상이 당신의 빛으로 덮여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는 당신의 손.
이렇게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에게 기대고 싶어요.
당신의 그 손을 언제까지나.

우주를 떠돌던 내 영혼, 이 별에 떨어졌네요.
파랗디 파란 바다에 빠지고, 밖으로 나왔어요.
파란 바다를 나오니, 푸른 하늘이 보이네요.
바다를 뒤로 하고, 뭍으로 나와 땅에 발을 딛어요.


문득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네요.
고개를 들어 그림자를 바라보네요.
그림자가 눈부신 햇살을 막아줘요.
햇살이 눈부실수록 그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죠.


그 그림자에 내 영혼이 한숨을 내쉬네요.
안도하는, 평안한 한숨을...
그 그림자의 주인공을 바라봐요.
역시나, 그대네요.

 


우주를 떠돌던 내 영혼, 그대를 만나러 이 별로 왔죠.
이 별에서 나를 처음 반겨준 사람, 그대였죠.
그대는 모르겠지만, 그대의 그림자는 기억할 거예요.
내 영혼이 잠시 쉬어간 그 순간을 그대 그림자는 알고 있을 거예요.


그대와 내가 이 별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대는 단지 우연이라고 생각할지라도,
나는 그대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왔죠.


말해봐요, 그대. 그대의 그림자.
내 영혼을 부른 것이 그대였노라고.
그대 그림자가 그대의 외로움을 채워주려 나를 불렀다고.
그렇게 말해줘요.

 

 

우주를 떠돌던 내 영혼, 이 별에 떨어졌네요.
이 별에는 파란 바다와,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살과
그리고 짙은 그림자가 있어요.
내 영혼, 짙고 짙은 그대 그림자에 매달려 있죠.

 

그대를 만나려고 그 머나먼 시간과, 그 공간을 떠돌다 왔어요.
이 순간 그대의 그림자에서 쉬려고 왔어요.
우주에서 이 별을 찾아온 이유는 그대가 사는 별이기에,
그대의 그림자가 나를 불렀기에 왔어요.

 

말해줘요, 그대. 편히 쉬다 가라고.
그대 역시 나를 만나러 이 별에 먼저 와 있었다고.
내 영혼이 그대 그림자에 영원히 기대 쉴 수 있게.
우주를 떠돌며 지쳐버린 내 영혼이 마지막으로 쉴 수 있게.

 


우주를 떠돌던 내 영혼, 그대를 만나러 이 별로 왔죠.
이 별엔 온통 그대 그림자만 보이네요.
이 별은 오직 그대 그림자뿐이네요.
어딜 봐도, 다른 것을 보려 해도 온통 그대 그림자뿐이에요.


그대 그림자가 드리운 곳.
그곳이 내가 있는 곳.
내가 있는 이 곳, 그대 그림자로 덮여가요.
내가 있는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


온 세상 모두 그대의 그림자.
이 별을 가득 메운 그대 그림자.
내 영혼을 가득 덮어주는 그대 그림자.
이 별엔 오직 그대만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그가 나를 몰라주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실패하면,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것이 더 행복하다... 라는 자기 만족을 한다.

 

하지만, 나는 어떤가?
혹시나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데도, 인연이 아니라며 외면하고 있지 않을까?

주변에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그쪽을 바라보지 않고,
내가 바라는 사람을 향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그 사람을 원망하겠지.
왜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냐고...
왜 나를 몰라주냐고...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나를 원망하며, 자신을 쳐다봐 달라고 울부짖겠지.

 

그 역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을 외면하며,
또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 역시,
또, 또, 그 역시 다른 누군가에...

 

 

인간의 운명이, 또는 인간의 감정이
내가 당신을 좋아하면, 당신도 나를 좋아하고
1이 2를 좋아하면, 2도 1을 좋아하고
A가 B를 좋아하면, B도 A를 좋아하는....

이런 식으로 수학 같지 않아서 분명히 재미는 있을 것이다.

 

수학 좋아하는 사람은 없잖아, 안 그래?

 

하지만, 내가 그 안에서 주인공이 되면 참으로 답답하다.
차라리 수학처럼 정해져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에게 닿는 길을 굳이 돌고 돌아가는 것까진 좋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다 이거야.
그러나...
당신에게 닿는 길을 돌고 돌아 머나먼 길을 가고 있다 믿었는데,
그 길이 결국 그대에게 닿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니...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의 끝이 그대에게 닿을지 닿지 않을지 모르고,
거기에 닿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했더니,

그 때문에 닿지 않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닿지 않을 운명이었는지

그것조차 모르기에...

 

답답하다.

...

...


그리고 살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그 답답함을 안겨준 적이 있겠지.
어쩌면, 지금 그러고 있을지도.

 


내가 그를 책망할 자격...

음, 자격이라...?
그래, 사람 감정이 향하는 것에 굳이 자격... 이라는 말까지 쓸 필요는 없겠지.
내가 그를 그리워하면서, 그를 원망하려는 행동은 하지말자.
나도 똑같을 수 있잖아.

 

심지어 나를 그리워한다고, 직접적인 표현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원망하지 말아야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사랑을 주니까 행복한 것이고,
그게 실패로 끝났을 때는 사랑을 받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라는 핑계를 대지 말자는 것이다.

 


죽을 무렵에나 그렇게 하든가.
어차피 끝날 거, 그 시점에서야 남을 원망하면 어때?
내가 사라지면 바뀌는 것도 없을 테니.
아니, 바뀌어도 아무 의미없을 테니.

 

물론, 죽을 무렵에 하는 원망조차 그 시점까지 그를 그리워했어야 원망이라도 하는 게 맞겠지만,
방금 말했듯이 뭐 어때?
곧 죽을 사람이 원망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고, 어차피 끝날 세상,

그 순간이라도 내 멋대로 남을 원망하다 죽으면 뭐 어떠냐는 것이지.

 


과연 나는, 죽을 때까지 그를 그리워할까?
그조차 아니면, 죽는 순간에라도 그를 그리워할까?
그럴 수 있을까?
죽는 순간에 그를 원망하든, 그리워하든...
그때까지 그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을까?
단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설마, 죽는 순간에도 그대에 대한 원망이니, 그리움보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라는 후회를 하진 않으려나?
최소한 그렇게 되진 말아야지.
차라리 내 인생을 헛되이 살았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후회를 하면 모를까
그에 대한 못다한 그리움을 후회하는 건 참 책임감도 없고, 슬프고, 우스운 일이겠지.

 

그냥 원망하며 스러지자.
죽기 전까지 그를 원망하자.
죽기 전에 그를 원망하자.
죽기 전 마지막 순간, 온 힘을 다해 그를 떠올리자.
그러니까 그 순간에 원망이라도 하려면 잊지 말고, 기억하자.
그대를.

 

그대를 내 마음 속에 품었다는 사실을.

아직은 그대를 내 마음 속에 담고 있다는 사실을.

언제든, 어느 때든, 어느 순간에든,

나 아직도 그대를 마음 속에 두고 있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도록.

늘 같은 다짐이지만, 먼 훗날에 당신이 혼자 되었다 느끼는 순간
절망과 슬픔으로 눈 앞이 아늑하게 멀어질 것 같은 그 세상에 그대를 혼자 두질 않을 겁니다.
그때가 언제든, 그때가 어떤 상황이든 그럴 땐 내게 말해주면 좋겠어요.

 

그때는 내가 그대 곁에 있고 싶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바로 알려주고 싶어요.
그대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 나이길 바라죠.


다시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다시는 당신을 세상 한복판에 혼자 있게 두질 않을 겁니다.

그날이 오면 하고 싶은 거야, 많지요.


뭐든지 처음인 것처럼 손 잡고 길을 걷고,

같이 영화를 보고 내용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놀러갈 곳 정보를 같이 찾아보며 토론도 하고,


뭘 먹고 싶냐고 물어보면 가만히 생각하는 모습도 보고 싶고,

같이 시외버스를 타고 익숙하지 않은 길도 가보고 싶고,

휴양림에 가서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을 같이 보고,


문득 당신이 말하길,

"그때 기억나?"

"언제?"

"우리가..."

라며 지나간 이야기도 해보고 싶고,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싶고,

내가 왜 당신을 힘들게 했는지 스스로 반성도 해보고 싶고,


그리고 그날이 오면, 무엇보다 먼저 당신을 으스러지게 안아보고 싶네요.

그래, 딱 이 무렵이 되면 아팠었지.

저항 기간이라고 해야하나, 적응 기간이라고 해야하나?


쑤시는 수준을 넘어서 아프다.

땡기는 수준이 아니라 아프다.


그렇다는 것은 곧 적응이 된다는 소리로 받아들이면 되겠지.

10년, 아니 12년 전 기억이 떠오르는 것도 참 신기할 따름이네.


그때처럼 무리하는 건 아니지만서도, 아픈 건 아픈 거였어.

일주일쯤 아픈 부위는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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